Sunday, July 23, 2017

찬양의 숲

하나님은 찬양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구원받고 새생명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3819절에서는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찬양은 병든 육체를 치료하고 정신의 질병을 치유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모티브가 됩니다. 또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의 제목을 찬양하고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찬양은 혼자 할 수도 있고 공동체가 어우러져 음악적 소양을 조화롭게 표현함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찬양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노래를 부르는 싱어가 있고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있으며 찬양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있습니다. 선곡하고 악보를 준비하고 연습하고 프리젠테이션으로 다같이 볼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이 조합되어 예배찬양이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예배찬양을 더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함께 협력해서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비단 음악적 소질이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누구나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회중이 함께 모여서 찬양할 때 음악적 재능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중찬양을 만들어가려면 음악적 협연을 위해 훈련 받고 능숙하게 노래하며 연주할 수 있는 달란트를 개발할 마음의 준비가 된 분이 필요합니다. 노래를 인도하는 인도자는 가사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며 부르고 정확한 음을 내야 합니다. 악기 연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의 찬양팀은 어린이, 학생, 젊은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어권 회중을 위해 빠르고 비트가 있는 영어찬양을 3곡 부릅니다. 영어찬양은 한어와 영어로 잘 불리어진 노래를 선곡하기 때문에 최근에 불려지고 있는 노래들은 아닙니다. 한어권 어른들을 위해 예배찬송가와 보혈찬송 혹은 은혜찬송가를 부릅니다. 그리고 최근 잘 불려지고 있는 복음찬양을 1, 결단의 찬양으로 1곡 부릅니다. 아마 최근 복음찬양을 부르실 때 처음 대하는 곡이기 때문에 낯설고 따라 부르기에는 음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세대가 다 같이 부르기에 좋은 찬양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보혈찬송이나 부흥찬양은 한어권 어른들에게는 은혜가 될 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나 영어권 회중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찬양은 균형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노래일지라도 다른 세대를 위해 함께 기쁨으로 참여해주는 사랑이 예배의 찬양을 더 은혜롭게 만듭니다. 한 찬양가수는 조화롭게 이해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찬양을 찬양의 숲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의 찬양사역을 더 넓히기 위해 찬양의 숲사역을 기도하며 기획하고 있습니다. 노래와 악기를 배우고 싶은 분들 찬양을 마음껏 부르고 은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찬양의 숲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목장에서 나누는 은혜가 대화로 이루어진다면 찬양의 숲에서 이루어지는 은혜는 노래와 연주로 이루어질 겁니다. ‘찬양의 숲사역을 기대합니다. -CSJ-


Sunday, July 16, 2017

오만과 편견

사람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사랑을 가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도를 알고 있어도 상대방은 사랑과 동정 사이에서 분별하지 못하고 감정이 흘러가는 데로 마음을 정합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순수한 사랑과 목적을 둔 관계의 미묘한 차이를 영국의 한 가정을 통해 그립니다. 재력과 사교매너를 지닌 '오만한 남자' 다이시와 확고한 성격의 '편견있는 여자' 엘리자베스의 만남, 다툼 그리고 화해에 이르는 감정변화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만남이나 소문을 통해 들은 얘기에서 발생하는 오해가 편견을 만들어 내고 결국에는 사랑을 가로막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해를 풀고 편견을 제거하고 사랑에 이르는 과정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많은 오해에 직면합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 임의대로 해석하는 오만이 오해를 부르기도 합니다. 오해로 의로운 사람을 거슬러서 함부로 말하며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우리는 말, 행동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나쁜 동기가 깔려 있으면 대부분 오해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을 오해하게 되면 그 다음의 모든 관계는 정상적인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오만으로 인해 오해하는 순간 관계가 금이 가고 꼬이기 시작합니다. 어떤 경우에 오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악한 오만이 더 위험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오만하다는 것은 교만한 모습과 유사하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기질입니다. 잠언은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을 오만한 자라고 합니다(21:24). 오만한 자는 우쭐대며 무례하게 행동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를 잘 내며 포학하고 허풍을 늘어논다고 설명합니다. 공동번역 로마서 12:16은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어 한 마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고린도후서 10:5에서는 하나님을 아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을 쳐부수고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라고 명령합니다. 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계략을 꾸미며, 한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만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은 의로운 성도를 오만한 사람으로 몰고가 자기의 편으로 만들기도 하고 성도끼리 다투도록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을 오만한 선동가, 불경한 이단자로 몰고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거스르는 오만한 자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오해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이해계산에서 나온 악행이었습니다. 오만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그릇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니까 어떤 기적도 말씀도 모두 오만으로 여겨지게 된 겁니다. 그 그릇된 동기가 배신자 가롯 유다를 낳았고 결국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사탄의 계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구약의 말씀이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리고 그 편견에 본디오 빌라도가 동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는 오만이 세상에 편견을 심고 권력을 움직입니다. 성도는 분별력을 가지고 오만과 편견의 늪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CSJ-


Sunday, July 9, 2017

평신도의 제사장 사역

가정교회 사역은 목장 사역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가정교회 사역을 진행하면서 한어권 연합목장을 운영해 왔습니다. 가정교회는 주일예배중심의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뛰어넘어 소그룹 모임인 목장을 통해 친교와 전도사역을 해 나갑니다. 주일예배 중심의 교회사역은 교역자 중심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가정교회 사역은 평신도와 교역자가 제사장임을 자각하고 교회의 사역을 공유합니다.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인 만인제사장설을 실천하는 선교적 교회사역구조 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직은 레위 지파가 맡았습니다. 레위 지파는 생업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땅의 지분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생업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분깃이 없어 다른 지파가 드린 제물을 분배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성전의 업무에 전념하여 찬양과 경배를 준비하고 성전관리를 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교역자는 레위 지파와 같습니다. 교역자는 생업을 가지지 않고 교회에서 녹을 받으며 생활합니다. 그 대신 교회의 예배 및 교육 사역과 기타 다른 사역에 전념합니다. 이는 신약교회 전통으로 재정립되었습니다. 신약교회는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도록 집사들을 세워 교회사역을 돌아보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구약시대의 레위 지파와 신약교회의 사도들과의 사역은 차이가 있는 것을 봅니다. 사도들은 예배를 인도하고 성도를 돌보고 교회를 관리하는 업무보다 더 영적인 일에 전념했던 것을 봅니다.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며 이 세상에서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야 할 지를 찾아 나갑니다. 그러므로 현대교회의 교역자는 더욱 영적인 일에 힘써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많은 영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도전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와 철학과 문화와 물질의 싸움입니다. 혼돈된 사회 속에서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신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현대교회의 교역자는 기도와 말씀에 근거하여 신학적으로 연구하고 설교합니다. 현대사회의 교역자에게는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학문적인 지혜와 지식의 사역이 요구됩니다. 마치 학교의 교사나 교수가 가르치기 위해 교재를 연구하고 교육방법을 연구하듯이 신학을 연구하고 효과적인 성경교육을 위해 연구하고 영적으로 코칭하는 직책입니다. 가정교회에서는 기도하며 말씀을 연구하며 삶공부를 준비하고 예수 영접모임과 침례를 베푸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교역자는 교회 안에서 일하고 예배와 교육을 인도하기 때문에 교역자가 제사장적 직을 감당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평신도는 어떻게 제사장 사역을 해낼 수 있을까요? 평신도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교회사역도 모두 감당합니다. 평신도는 배운 지식과 습득한 기술을 이용해 사회에서 일을 하면서 교회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평신도의 사역 폭은 의외로 넓습니다. 교역자가 해야 할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역 외의 다른 모든 순서는 평신도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정교회의 사역은 전적으로 평신도 사역입니다. 목장을 열어 음식을 준비하고 목원들을 섬기는 사역부터 VIP를 찾아 목장에 초대하고 이끄는 목양사역도 평신도의 사역입니다. 목원의 가정사를 돌보며 중보기도하고 심방하는 일도 목자, 목녀가 감당합니다. 이제 평신도도 교회의 제사장입니다.  -CSJ-


Sunday, July 2, 2017

격려와 위로 그리고 쉼

여름방학 동안 학업중인 자녀들은 집에서 생활을 합니다. 학교생활을 하다가 방학을 맞은 자녀들을 집에서 돌봐야 하는 엄마들의 과중한 업무가 시작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상대가 가족일지라도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주 한국신문에서 혼자서 홀어머니를 돌보다가 과중한 업무와 정신적 탈진으로 결국에 죽음을 선택한 불행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은 늘 자신의 정신건강을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현대교회에서 등장하는 사역 중에 희생하며 섬김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쉼 사역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 교육을 위해 떨어져 사는 기러기 가족을 위한 사역입니다. 자녀를 돌보는 엄마나 돈을 보내는 아빠나 모두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치르며 살아갑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부부 모두에게 정신적 영적 사역이 필요한데 그것은 격려와 위로와 쉼의 사역입니다. 건강한 정신과 강한 영적 능력이 채워져야 합니다.
또 다른 예로 가정교회 사역 안에서 매주 집을 열고 목원들을 초대하여 섬기는 목자부부에게도 격려와 위로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목장을 돌보는 목자와 목녀를 견인하는 힘은 보상심리나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영혼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 마음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리고 감당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영적 능력을 줍니다.
보통 목자 가정은 매주 집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여 목원들을 맞고 VIP를 초대합니다. 목자 사역을 안 했으면 평안히 가족들과 함께 쉴 수 있는 주말저녁이지만 예수님의 영혼구원에 대한 마음을 알기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지만 목자, 목녀에게도 격려와 위로와 쉼이 필요합니다. 목장을 멈추고 누리는 쉼이 아니라 목장을 이끌고 나가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는 격려와 위로입니다. 목장사역을 감당하는 사명자는 육체의 안락과 정욕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구원을 위한 십자가 능력을 사모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나아갑니다.
지난 주 저희 가정은 캘리포니아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2시간 남짓 운전을 하고 가는 여행길이 휴가가 아니라 어쩌면 더 고행 길인지도 모르지만 옛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쁨 때문에 뜨거운 여름 햇빛을 가르며 차 안에서 에어컨 바람에 의지해 참고 갔습니다. 정말 삼 년 동안 보지 못하고 음성으로만 문자로만 연락해야 했던 친구들을 보는 기쁨은 컸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집사람과 저도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여름의 휴가를 보냈습니다. 낯 뜨거운 얘기지만 목사가정에게도 격려와 위로와 쉼의 사역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 가정을 위해 기꺼이 게스트룸을 제공해주고 식사에 초대해주는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가족휴가였습니다. 맥알렌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고 온 듯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날마다 영적으로 공급이 있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친구들을 통해 힘과 능력을 더해 주셨습니다. 격려와 위로와 쉼에서 오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CSJ-


필리핀 선교 후원

지난 5월 초 필리핀의 바콜 롱고스 빈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400여 가구, 22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여 인근 학교와 한인 선교사님이 세운 롱고스 교회에 분산 수용 중입니다. 이곳은 극빈민가로 마약거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탈선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의로 의한 화재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필리핀 목장이 후원하고 있는 정진효 선교사님 가정은 이곳에서 어깨동무 사역을 진행하면서 교회 건축에 동참하고 유치원, 청소년 사역에 참여해왔습니다. 작년에 교회로 사진을 보내와 어린아이들을 섬기고 있는 모습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이번 화재는 너무 큰 화재라 생수, 옷가지,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한낮의 온도가 맥알렌과 비슷하게 섭씨 40도까지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 속에서 비영리 단체가 배급해 주는 최소한의 후원물자로 복구에 전념하고 있답니다.
우리 교회가 필리핀 바콜 롱고스에서의 선교사역이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동참하기 원합니다. 72일 주일헌금 시간에 준비된 필리핀 선교헌금을 같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아진 선교헌금을 필리핀으로 바로 송금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재정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더 어려운 필리핀 선교사역의 회복을 위해서 후원하는 것이 선교 동역자의 자세라고 믿습니다. 마치 유대인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홍수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방인의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가 헌금했던 신약교회의 협력을 기억하게 됩니다.
선교지를 갈 수 없을 때 선교를 위한 간접적인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후원보다도 더 강력하고 필요한 영적 후원입니다. 저는 새벽기도 시간에 후원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보내주신 선교편지를 기억하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여 그곳에서 일어나는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탭니다. 또 연결되어 있는 선교사님들을 메신저로 격려할 수 있습니다. 절기마다 격려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안부를 묻고 기도제목을 묻습니다. 때로 기대하지 않은 메시지가 큰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관심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인 아니어도 선교팀이 구성되어 선교지를 방문하길 원합니다. 흔히 탐방선교라고 하는데 방문해서 사역지를 경험할 수도 있고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선교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선교지에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현지 목회자들을 위해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남미 나라이지만 방문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시간적으로 제약이 있어 아직은 사양만 하고 있습니다. 또 선교지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 건물을 세우는 일, 우물을 파는 일,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 한국어와 문화를 소개하는 일 등등.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물품을 보내는 일도 있습니다. 생필품을 모아서 보내거나 간단한 약품, 도구 등을 보낼 수 있습니다. 또 선교사님을 선교대회에 초청해서 말씀을 듣고 함께 교제하며 쉼을 제공하는 것도 귀한 사역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선교사역이 이루어지길 사모합니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