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6, 2017

블랙 프라이데이 화이트 선데이

추수감사절은 11월 네 번째 목요일입니다. 그 다음날 금요일이 바로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입니다. 회계장부에서 빨간색은 지출을 의미하고 검은색은 소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블랙은 적자를 벗어나 흑자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입니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연중 적자를 흑자로 바꾸기 위해 대대적인 세일을 하면서 재고 떨이를 하는 날 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선 싸게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유사하게 온라인 업체 아마존은 사이버 먼데이라고 하여 월요일에 할인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혹자들은 만약 블랙 프라이데이가 없어져도 업체들은 그레이 썰스데이(Grey Thursday)’ 같은 새로운 할인 판매가 가능한 날을 만들 것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기업들은 특정한 날에 의미를 부여해서 판매효과를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영업작전을 세웁니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빼빼로 데이, 싱글즈 데이 등 각 나라별로 영업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날을 잡아 홍보하여 새로운 소비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절기를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절기는 그 날의 의미를 잊지 말고 정기적으로 생활 중에 되새기고 자손 대대로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주요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영어로 passover넘어간다는 의미로 유대력으로 114일 입니다. 400여년 동안의 노예상태에서 자유의 백성으로 풀려날 때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10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애굽에게는 재앙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그 중에 열 번째 재앙이 바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넘어갔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은 유월절을 제정하셨습니다. 유월절 절기는 신약교회의 성만찬의 근거가 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어린 양의 피로 상징되었습니다.
칠칠절은 일곱일이 일곱 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유월절 첫 안식일 후 50일째 되는 날로 36일입니다. 영어로는 pentacost라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날은 밀의 첫 열매를 봉헌하는 절기로 봄에 얻은 수확물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보리의 첫 열매를 드리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바로 이 날 성령님께서 임하셨기 때문에 성령강림절로 지킵니다. 장막절은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유대력으로 715일로 보통 9, 10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며 보호해 주심을 감사해서 가을 토지의 소산을 드려 감사하는 날입니다. 현대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 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기념하는 날의 의미는 현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블랙 프라이데이가 세속적으로 업체의 흑자를 위해 존재한다면 성도는 매 주일을 화이트 선데이로 지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과 재림을 기억하며 회복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죄로부터 씻겨져 영광의 천국으로 들어갈 소망을 되찾는 날이 바로 화이트 선데이가 매 주일로 계속 지켜 지기를 소망합니다. -CSJ-


Sunday, November 19, 2017

상식과 신앙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합니다. 혼자 고립된 인간은 바른 삶을 사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 보여 동반자 하와를 창조해 주십니다. 남녀가 성인이 되어 부모의 곁을 떠나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일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만드신 일입니다. 그런데 현대문화 속에서 결혼은 그 정의조차 불분명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전통과 문화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본래의 개념이 바뀌고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사회와 문화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사회는 구속력이 있는 법과 제도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구속력이 없는 전통과 상식을 따라 움직입니다. 법과 제도를 어기는 행위는 처벌이 따르지만 전통과 상식을 깨면 불편하고 고립됩니다. 진리는 법과 제도와 전통과 상식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리를 추구하면서 사회가 갖고 있는 전통과 상식을 지킵니다. 때때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행동과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상식에 어긋한 삶의 방식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몇몇 기독교 이단은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가족관계를 깨뜨리고 이혼을 부축이고 가족의 재산을 헌물하도록 요구합니다. 가정을 떠나 합숙생활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를 유지한다고 하면서  인간관계를 이간시키고 중상하고 모략합니다.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교회를 이루어 갑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알려면 상식이 통하고 인정되고 있는지를 보면 쉽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는 비상식적인 생활을 버리고 진리를 쫓으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상식을 초월하되 비상식적인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신약시대 초대교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한국의 초기 교회도 세상 문화를 건강하게 이끌고 주도하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하는 경건한 생활이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인들을 종처럼 부리며 평민을 하대하는 양반문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안에서 깨졌습니다. 한 건물 안에서 같은 공간 안에서 양반과 평민 천민들이 평등하게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첩을 두는 결혼문화가 성경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교회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근절되었습니다. 기존의 첩들에게 재산을 떼어 주고 독립하도록 배려하는 운동이 한국 초기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전통과 문화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는 힘은 성경의 진리에서 나옵니다. 기존의 상식이 진리와 위배될 때 성도는 진리를 수호하며 진리를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진리와 부합하는 상식을 지키며 수호하는 일을 성도는 해야 합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문화창조의 주체가 되고 상식을 진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존경하고 교회의 지체가 되려 합니다. -CSJ-


Sunday, November 12, 2017

쓴 뿌리 내적 치유

쓴 뿌리는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상처받은 마음입니다. 부모에게서 부부 간에, 친구 사이에 사회생활 중에 받은 분노, 외로움, 슬픔, 두려움, 좌절감, 거절, 수치심, 낮은 자존감, 불안 등과 같은 마음이 쓴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쓴 뿌리는 트라우마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자리 잡고 있다가 불안한 심신상태가 발생하면 자신도 모르는 감정과 행동으로 분출됩니다.
한인들은 목소리가 큽니다. 크다기 보다는 시끄럽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사회적 구조와 분위기가 경쟁적이고 복종을 요구하는 조직 속에 억압된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울분과 분노와 한 같은 쓴 뿌리가 내재해 있다가 큰 목소리로 표현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작은 일에 화가 나고 목소리가 커집니다. 자신을 알아 달라며 큰 소리로 우는 유아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톤을 바꾸어 말합니다. 화를 내는 것은 아닌데 짜증과 불만이 목소리에 섞이게 되어 듣는 사람들의 불쾌지수와 스트레스가 덩달아 올라갑니다. 쓴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속한 가정, 교회, 사회는 목소리가 크고, 유머가 없으며, 전투적이고, 비판하고 비난하며 혼내는 문화가 일반적입니다. 반대로 쓴 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속으로 삭히면 우울증이 됩니다. 표현하지 못하고 무의식 속에 쌓아 놓고 있다가 정신의 병, 마음의 병이 됩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와 일터는 어떨지 자가 진단을 해봐야 합니다. 나는 왜 마음이 불편한가? 내 목소리는 왜 커지고 있는가? 나는 왜 윗사람에게 불만을 품고 있고 아래 사람에게는 화를 내고 있는가? 아마 스스로 이유를 따져 물어보면 어떨 때에는 별문제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닌 데도 스스로 화를 돋구어 분노를 표현하고 목소리가 커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신 안에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쓴 뿌리가 표출되면서 감정을 상하게 하고 목소리가 커지며 행동과 태도가 비정상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쓴 뿌리를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히브리서 1215절은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생긴다고 경계합니다. 그러면서 쓴 뿌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기 때문에 생긴다고 알려줍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했지만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면 젖먹이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공급받아야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쓴 뿌리 때문에 내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감정이 허락하는 데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쓴 뿌리가 남아 있으면 복음의 씨가 마음에 뿌려져도 능력으로 나타나질 못합니다. 마음 밭에 쓴 뿌리가 남아 있어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쓴 뿌리는 상한 감정과 나쁜 기억에서 옵니다. 쓴 뿌리가 생겼던 순간으로 돌아가 악한 의도로 상처를 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상처를 싸매고 치료하시는 예수님께 보일 때 은혜를 경험하고 내적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CSJ-


Sunday, November 5, 2017

성도의 말

사람의 마음은 말을 하든지, 글로 쓰든지, 행동으로 표현 됩니다. 특별히 사람에게 말은 그 됨됨이와 인격을 반영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낙심 시키는 일도 벌어집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의 중요성과 함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작은 키가 큰 배를 움직이는 것처럼 혀도 몸을 제어한다고 비유하면서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최근 미셸 오바마 여사가 함부로 자신의 의사를 SNS에 남기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만약 글로 자신의 뜻을 표현할 거라면 문법과 형식을 갖춰 제대로 된 문장으로 남기라고 합니다. 한번 표출한 마음의 표현은 주워담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시편 141편의 저자는 입술의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입으로 표현되는 말이지만 말을 하고 안 하고는 자신이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잘 간수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말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상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없지만 상한 감정의 표현으로 거친 말이 나오지 않도록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말의 실수를 줄이는 한 방법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실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 성숙하게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말과 감정의 실수를 범하게 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자 모세는 백성들을 반역한 무리라고 저주하며 분을 내어 반석을 두 번 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모습을 징계하셨습니다. 분을 품게 되면 실수하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가르칩니다. 감정이 상하고 분이 난다고 해서 바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오래 참고, 인내하며 절제하는 모습이 필요한데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내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때 성령 하나님이 나의 내면세계를 다스릴 수 있도록 의탁해야 합니다.
성내고 분노하는 마음은 상황과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깊게 넓게 생각하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어날 결과를 내 생각으로 단정지을 때 생깁니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고 불완전합니다. 쉽게 바뀌기도 하고 정확 하지도 않습니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관 관계를 생각하면 겸손하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되면 분노하는 마음이 들지 않고 동감이 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는 결과적이기 보다는 과정적입니다. 지금 마음의 상태가 불안전하기 때문에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바뀌 지도 않고 더 좋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를 기대해서 판단하면 분노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누구나 연령이나 교육이나 직분에 관계없이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해를 갖고 서로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칠 때 말의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구원의 여정 가운데 성화되어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