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24, 2017

한글 문화 사역

현대교회의 선교전략은 선교적 교회를 세우는데 있습니다.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 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선교를 존재목적으로 알고 체질로 삼는 교회입니다. 영혼구원이 행사나 비전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이유가 되는 것 입니다. 성도가 곧 교회의 지체입니다.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모든 성도가 선교적 삶을 사는 것 입니다.
우리교회가 선교적 교회로서 든든히 세워질 수 있는 길은 선교적 목장이 되는 것 입니다. 매일의 삶이 선교적 삶이 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전하는 나눔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교회는 당장은 세 개의 목장으로 운영이 될 겁니다. 한어권 목장, 영어권 목장, 어린이&학생 목장입니다. 헌신된 목자가정이 세워지고 목장이 평신도 리더에 의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영어권 교회가족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아마도 그런 관심 때문에 한인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의사소통은 영어로 하지만 한국문화를 더 깊게 이해하고 나누기 위해 한국어를 소개하는 것이 한어권 가족들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 해부터 추진하려고 했지만 여러 이유들이 있어서 미뤄왔다가 5월 첫째 주 토요일 오전 10:30부터 한국어 교실을 시작합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재나 자료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담당할 평신도 사역자도 정해졌습니다. 함께 이 귀한 사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여러 모양으로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한국문화사역이 선교적 교회의 사역으로 자리잡기를 원합니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한인교회에 왔지만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주일연합예배 때 설교를 한어설교와 같은 내용으로 영문원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설교시간에는 통역기를 이용해 설교원고를 읽게 해서 영어권 가족들이 듣고 은혜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통역이 이뤄지면 더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이 방법이 저희에게는 최선입니다. 한 말씀으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묶인 가족으로 하나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배를 함께 드릴 수 있다면 더 많은 타문화권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도되어 교회의 지체로 세워지는 것이 가능합니다. 한국어 강좌를 통해 타문화권 사람들이 우리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그 중에 한국인의 신앙생활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이 되고 함께 예배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선교적 교회의 한 모델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인교회로서 밸리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타문화권의 영혼들을 교회의 지체로 세울 수 있는 고유한 선교적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겁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영혼들을 살리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고 선교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선교의 소명이 현대교회의 성도에게 넘겨졌습니다. 한국문화강좌를 통해 타문화권 사람들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려는 이 귀한 사역을 위해 함께 동참해 주시고 담당하는 평신도 리더를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CSJ-


Monday, April 17, 2017

비즈니스 심방

목회의 한 부분으로써 심방은 매우 중요합니다. 심방의 의미를 일반적으로 영혼 돌봄에서 찾습니다. 심방은 성육신 사역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인간으로 오신 것이 심방의 성서적 이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을 때 방문하셨고, 죽은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고 세리장 삭개오의 집도 방문하셨습니다. 세리로서 일하고 있는 마태를 찾아가셔서 부르셨고, 그물을 손보고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방문하여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바울은 가정교회를 방문하고 문안하였고, 편지를 써서 사람을 보내서 서신 심방을 행했습니다.
심방은 문제를 겪고 있는 자를 위해, 병든 자를 위해, 구원사역과 제자 삼는 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약교회는 과부들을 돌보기 위해 구호 음식을 들고 집을 방문했고 이 사역을 위해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구제사역의 한 방법으로 생활이 어려운 성도들을 심방했던 겁니다심방목회가 집사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방은 교제의 기능과 아울러 선교적 기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실행하고 있는 가정교회 사역은 신약교회가 행했던 목회사역을 지향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목양사역을 평신도 목자에게 일임하고 목회자는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념하도록 합니다. 우리 교회는 가정교회의 원형목장으로 목회자의 가정에서 가정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부활절 주간을 이용해 비즈니스 심방을 교회적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가정심방은 매주 금요일 연합목장에서 각 가정의 기도제목을 나눔으로써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말 그대로 한 가정에서 여러 가정들이 모여서 생활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요일 모이는 연합목장에 더 많은 가정이 참석하길 권합니다.
가정교회는 각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디에 있는지 서로 알아가는 목회사역입니다. 부부의 어려움, 부모와 자녀와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 물질과 관계에서 오는 환경의 어려움을 가정 단위로 고백하고 간증하며 중보기도를 요청함으로써 믿음 위에 세워져 가는 신앙의 가정이 되도록 합니다.
일반적으로 가정교회의 비즈니스 심방은 목자가 사업장이나 일터를 심방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특수한 상황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의 일터를 방문하여 함께 기도제목을 나누고 축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정직과 공의로 사업장에서 혹은 일터에서 일하기로 결단하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실패와 물질에 대한 걱정 없이 사회생활 할 수 있기를 빌고, 감당할 수 있는 건강을 지켜주시고, 언약으로 준비된 미래의 복을 위해 이번 비즈니스 심방에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CSJ-


Wednesday, April 12, 2017

종려주일과 성금요일

부활주일 전 주일을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종려나무(palm tree)는 아름다움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어 환영하면서 생긴 날을 기념합니다.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 지시기 전의 일입니다. 이 날을 호산나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구원이니까 예수님 이름의 뜻대로 지금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정치적인 혁명이나 해방을 기대했습니다. 로마의 통치와 핍박에서 자유인이 되도록 이끌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으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신자들은 예수님을 잘못 이해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가 나오기만 하면 이 땅의 일들이 잘 되고 복 받는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도 기도를 정성껏 드리면 내 뜻을 이루어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십자가 지실 예수님을 혁명가로 오해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채찍질을 당하시고 매를 맞아도 아무 항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취급 받으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연약하고 힘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군중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혁명가인 예수님이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종려주일의 호산나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결코 군중을 움직이고 정치적 군사적 혁명을 일으켜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로마의 속박이 아니라 악마의 죄의 속박 가운데 있는 고통 당하는 영혼을 위해 예수님은 호산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옛사람이 죽어야 부활의 새사람이 탄생합니다.
종려주일로 시작하는 주간을 보통 고난주간이라 하고 금요일을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부릅니다. 성금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입니다. 그 다음날 성토요일은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된 날입니다. 부활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이 죽으심-묻히심-부활하심을 겪는 삼일을 라틴어로 트리두움(Triduum)’이라고 하여 특별하게 교회절기로 지킵니다. 신약교회는 이 기간 동안 시간 별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고 그 장소를 방문하면서 십자가 구원과 부활을 다시 상고했습니다.
가정교회는 금요일에 모이는데 이번 금요일 연합목장은 교회에서 성금요일 예배로 함께 드리려고 합니다. 성금요일 예배를 십자가의 예배로 드리면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행하셨던 성만찬식을 갖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있어야 구원이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연합목장으로 드리는 성금요일 예배를 통해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이 다시 우리 교회와 각 가정에 재현되기를 원합니다. 희생과 자기포기는 힘든 결정이고 행동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그 헌신을 받으십니다. 성금요일 예배에 함께 동참해서 귀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길 축원합니다.  
-CSJ-


Monday, April 3, 2017

섬김의 소명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워 아침 일찍까지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고 수고하는 제자들에게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은 그물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고 나서야 일러준 이가 예수님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워 생선을 굽고 빵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을 먹어라고 말씀하시면서 힘겨운 밤일을 마친 제자들을 먹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겸손과 섬김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배신할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겸손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게 여기는 마음과 자세이고, 섬김은 나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다른 신도들을 섬기는 행동입니다. 한 몸 된 교회 식구들에게 먼저 겸손과 섬김의 도를 다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간에, 성도와 성도간에 직책과 경륜을 초월해서 한 형제, 자매로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섬김은 상대의 영적, 정신적, 실제적 필요를 알고 도움을 주는 겁니다. 겸손은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상대방을 불평하고 비난하면서 겸손의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 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을 보고 섬기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섬김의 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상대방의 출신이나 신분을 보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와야 할 필요가 있으며 섬기라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들로 인해 사람들에게 겸손하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가르침은 섬김의 위대한 정신입니다. 내게 악한 일을 행했을지라도 선으로 섬김의 도를 다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영적인 도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도망갔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연약한 그들을 이해하시고 당장의 필요를 아시고 조반을 준비해서 먹이셨습니다. 오늘 내가 섬겨야 할 영혼은 누구입니까? 나의 말을 나의 시간을 나의 물질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나의 오늘의 이웃입니다. 기꺼이 나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여 섬김의 도를 다하길 바랍니다.
칼빈은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의롭게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왕의 직분이 군림하고 다스리는 특권이라고만 생각하면 통치자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왕과 같은 권세가 있더라도 다스려야 할 백성들을 동등하게 여기고 섬기지 못하면 바른 통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섬기는 리더십을 Servant Leadership이라고 합니다. 왕이 종으로 섬길 때 의의 통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특권을 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왕의 직분으로 종처럼 섬기며 살아가며 겸손과 섬김의 도를 자랑하라는 소명입니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