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사탄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방해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종교적 생활과 율법에 빠지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신앙적 우월감을 갖도록 하는 겁니다. 종교주의와 율법주의는 영적 교만을 심어주어 종교적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종교적 우상에 빠져있는 교만한 종교인들을 저주하시고 종교인에게 버림받은 겸손한 신앙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율법과 전통 어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이상이 여기고(눅 11:38)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는데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냐고 불평합니다(눅 5:30). 왜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냐고 따집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율법과 전통에 어긋난다고 고발합니다(눅 6:7). 종교인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 말씀의 생명력은 못보고 종교적 의식과 율법, 전통으로 굳어진 죽은 말씀을 이용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겸손한 사람임을 가르칩니다(눅 18:9-14). 이 바리새파 사람은 혼자 말로 자신은 남의 것을 빼앗는 자, 불의한 자, 간음한 자, 또한 세리 같지 않다고 밝히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기도하고 십일조를 바친다고 자랑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한 사람은 바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 세리였습니다.
종교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진 바리새인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혼자 말로 기도합니다. 성경을 날마다 읽고 수시로 암송했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의를 세우는 종교적 명령으로만 수행했던 겁니다. 현대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종교적인 습관과 형식으로 읽기 쉽습니다. 마치 혼자 말하는 것처럼 그저 읽고 기억도 하지만 마음에 두고 삶에 적용하는 생명의 운동력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적 생활을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눅 11:39)라고 가르칩니다.
성경통독은 몇 번 읽었는지를 계수해서 신앙의 등급을 따지는 잣대가 아닙니다. 1,000번 성경을 읽어도 그 말씀이 우리의 속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면 생명은 없고 형상만 남아있는 굳어진 화석과 같습니다. 성경통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통으로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을 전인적으로 갖춰나가는 특별한 영적 훈련입니다.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성경읽기는 충만한 사람을 만들고 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과 깨달음을 자신의 글로 표현하여 적어두는 영성 습관은 성경통독의 유익을 더 깊게 체험하게 합니다. 아울러 혼잣말이 아니라 목장 안에서 나눌 때 함께 말씀의 충만한 은혜를 공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면서 사역하셨습니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