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31, 2016

성도의 축복기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는 보통 삶 위에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1:8, 1:29, 살후1:5). 집사 빌립은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전도자로서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평신도에게 전도자라뇨?”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평신도이기 때문에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일주일에 5일을 직장에서 사업체에서 교회를 떠나 생활하는 성도는 평신도입니다. 불신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목사보다 평신도에게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받은 백성으로 부르실 때 평신도이니까 주일에 교회에 출석해서 주일예배 드리고 편하게 살아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평신도 제자들에게 더 큰 복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불신자를 만나는 현장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르신 겁니다.
고난과 축복 중에서 선택하라면 모든 성도들이 축복을 선택할 겁니다. 고난 받기를 자청할 필요는 없지만 성도로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가 되는 순간부터 사탄은 성도를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고난을 당하게 하고 유혹하면서 믿음가운데 멀어지도록 시험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동일한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 고난을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가난하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도우셨습니다사탄은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몰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영광의 부활 승리로 이끄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같은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의 축복은 예수님의 피에 참여하고 그의 몸에 참여하는 겁니다. 성도의 생활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품는 생활입니다. 어디서고 언제고 복음이 내 생활을 통해 드러난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사탄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이 성도의 마음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성경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이 됩니다. 성도는 정직하게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신자를 만났을 때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이 곧 축복입니다. 좋은 직장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기업을 세우고 번창해 성공하는 것이, 돈 많은 것이, 건강한 것이, 자녀들이 출세하는 것이, 행복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난도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걱정근심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과 예배로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믿음이 곧 축복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위해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복 받도록 기도합니다.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고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음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도록 구하는 것이 그 어떤 행복을 기원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기도입니다.  -CSJ-


Sunday, January 24, 2016

만남, 변화 그리고 파송

하나님은 인생들을 만나기 위해서 친히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많지만 그 결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만남을 가지면 영원한 삶을 얻게 되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면 사탄의 권세아래 그냥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고 악인이 선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보통사람들과의 만남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고 연약한 마음을 든든하게 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확고하게 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끼리의 만남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한 성도를 만났을 때 건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만남은 죽은 만남입니다. 더 나쁜 경우는 만날수록 내 육체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만남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보내기도 합니다. 교회를 떠나는 경우는 대부분 잘못된 만남 때문에 생깁니다. 목회자를 잘못 만나고 성도를 잘못 만났을 때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좋은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변화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경건한 목회자를 만나고 친밀하고 신뢰할만한 성도들을 만나도 내가 건강하게 변화하지 못하면 그 관계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났을 때 거듭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처럼 신뢰의 동역자를 만났을 때 구원의 긴 여정을 함께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일회성 만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일평생 예수님과 끊임없이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동역자와 많은 만남을 갖고 깊은 대화와 나눔을 통해 서로를 지탱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 닮아가는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하나님은 좋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건강한 변화가 일어난 후 공동체를 떠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전히 복음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있습니다. 복음은 알아도 헌신되지 못한 연약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늘 도전합니다. 든든히 서서 저 영혼들에게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교회 공동체는 믿음의 동역자를 파송하게 됩니다. 파송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순종하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정착해서 잘 지내고 있는 현재 상황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곳으로 옮기고 낯선 상황들을 직면해야 하는 파송은 분명 누구에게나 힘들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파송하고 파송받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누가 파송을 받을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본인만 알 수 있는 소명의 부름심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여건이 파송될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원해서 파송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파송은 공간적으로 떨어짐이고 이별입니다. 슬프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파송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음을 심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십니다. 오늘 한 가정을 떠나 보내는 아쉬움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복음이 필요한 영혼을 위해 파송하십니다. -CSJ-



Monday, January 18, 2016

가정교회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고찰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역하셨을 때 이미 왔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직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때가 될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지만 세상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완전히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도록 독려해 주십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는 삶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거룩한 삶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정직과 공의가 실현되는 천국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 예수님 닮아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산 성도만이 상급 받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 교회가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입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완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의인으로 칭함 받은 성도들이 모여있지만 완전한 의인들은 아니기에 실수하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할 교회의 유일한 구성원이 됩니다.
예수님은 알곡과 쭉정이 비유를 하시면서 악한 사람들 즉 사탄이 쭉정이를 심어놓는다고 하셨습니다. 거룩해야 할 교회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쭉정이에게도 교회생활을 허락합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일군들이 쭉정이를 뽑아내어 불에 태우게 됩니다. 교회는 알곡과 쭉정이가 섞어져 있는 신앙의 공동체 입니다. 교회 모든 것을 정직하게 공의롭게 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모든 기관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공의롭게 그리고 용서하며 화해하고 섬기며 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구원을 책임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로 운영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예배하고 구제함으로 이 땅에 사탄의 통치하에 있는 영혼들을 구해내야 합니다. 교회는 이 구령사역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가정교회의 힘은 계속적인 불신자 VIP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현대인들은 복음증거와 말씀선포에 잘 반응하지 않습니다. 먼저 믿은 성도의 삶을 보고 그들의 믿음을 결정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교회사역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영혼들을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인도하는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자는 겁니다. 가정교회는 이미 복음을 접한 이들에게는 섬김의 도전을 요구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에게는 섬김으로 마음 문을 열게 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촉구합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늘입니다. 이 결과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을 만족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CSJ-


본이 되는 성도의 삶

사람은 누군가에게 보고 들은 바를 습득하며 살아갑니다. 홀로 성장할 수도 없고 홀로 살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때로 편협한 이기적 가치관에 갇혀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입술의 고백과 대화에서 혼자 잘 났다는 느낌을 공통적으로 갖게 됩니다. 우리는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신앙생활의 단편을 배우고 그것들을 종합해서 각자의 신앙의 색깔을 입힙니다. 마치 퀼트 작품같이 우리의 가치관은 이것 저것 붙여놓은 듯해 보입니다. 분명 우리는 여러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변형시켜 각자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놀라운 것은 각 부분은 단순하고 다르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기 좋은 퀼트 작품이 된다는 겁니다. 그저 다른 단편들을 모았을 뿐인데 보기 좋은 작품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인격의 단편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렇게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 보고 코끼리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인격도 그렇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인격의 단편들을 조화롭게 성숙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안목으로는 우리 자신이 어떤 신앙인격체가 될 지조차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지식, 경험, 말씀의 깊이와 적용 등을 통해 온전한 인격체가 되도록 디자인하십니다. 신앙이 성숙해 간다는 것은 신앙인격이 온전하게 이루어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기성세대는 다음세대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을 미루거나 결혼을 포기한 젊은이들의 대부분이 결혼에 대한 안 좋은 사례들을 보았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기대를 버립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다른 두 사람을 짝을 짓게 하시고 조화롭게 결혼에 이르도록 하셨지만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 부부의 삶은 다음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속이고 이간질하며 거짓말하고 서로를 심판하는 기성 성도들의 오만함이 다음세대를 교회에서 떠나 보냅니다. 다음세대는 기성세대에게서 신앙생활의 본을 찾기 원합니다. 다양한 신앙의 본을 찾는 다음세대는 그 사례들을 짜맞추고 조합하여 자신의 신앙생활을 디자인합니다. 부정적인 사례가 많을수록 다음세대는 신앙의 회의에 빠지게 되고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제 1세대가 올바른 신앙의 본을 세워야 합니다믿음의 본은 정답이 없습니다. 각 성도가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은 데로 해답을 찾아갈 따름입니다. 다음세대는 그렇게 바른 신앙생활의 해답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신앙을 갖고 성장해 갈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의 기성세대가 신앙생활의 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섬김의 도를 다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신앙의 근본은 겸손과 섬김입니다. 하늘보좌를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겸손함, 버림받고 멸시당하던 이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과 섬김의 도를 세워야 합니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