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회의 성령사역은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가정교회는 초대교회의 원형과 정신을 계승하고 현대사회에 적용하려고 하는 목회원리에서 비롯된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로 시작되어 조직교회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기초에는 성령의 사역이 뒷받침되어있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는 성령사역을 현대에 이민교회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역사가 일어난다(행19:5,6). 교단적으로 오순절 교회에서는 구원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과 예언이 그 표징으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보수주의 교단에서의 의견은 다르다. 그래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이론은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목회현장에서 성령사역에 대한 이견이 충돌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현상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하는 목자가 가정교회를 이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현대에도 방언과 예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신학적인 이견이 된다. 현대교회에서 영적인 현상은 방언 외에도 직통계시, 금니 발생, 기도 받을 때 쓰러지는 현상, 치유, 불세례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영적인 현상을 가정교회가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까? 사실 이 주제는 가정교회에게는 큰 숙제가 아니다. 가정교회는 영적 현상을 추구하거나 ‘성령운동’을 일으키는 목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교회에서도 성령사역의 한 단편으로 영적인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성령사역의 모든 것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가치 있고 분명한 성령사역이 성경에 나타나 있고 초대교회에 전개되어 있는데 지협적인 현상 때문에 성령사역의 본질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사탄의 전략이 될 수 있다.
가정교회는 초대교회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도록 사도를 따로 세운 것처럼 목회자를 기도와 말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전념한다는 것은 모든 생활 속에 기도와 말씀을 적용하고 예수님 닮아가는 성숙한 인격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삶의 모습을 갖추고 싶지만 여전히 죄성을 안고 사는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순간의 유혹과 싸워야 하고 세상 가치관을 분별해내야 하고 사탄의 전략을 간파하고 대적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성령께서 성도에게 필요하다면 방언도 주시고 예언도 치유도 쓰러짐도 또 다른 영적 현상도 주신다. 그러나 영적인 현상은 교회사역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성령과 늘 동행하며 모든 삶의 문제를 질문하고, 풀 수 없는 상황을 성령께서 개입하시고 간섭하도록 의탁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생활이 된다.
성령 충만한 신앙은 영적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질병이 치유 받을 수도 있지만 치유되지 않는 것도 성령 충만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성숙한 가정교회의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주권에 의탁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배우고 연구한다. 성령사역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성령이시다. 모든 성령사역을 인정하되 우리 가정교회가 취할 수 있는 건강한 성령사역을 기대하고 수용해야 한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