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28, 2019

추수감사절 연합예배 연합축제


추수감사절은 축제의 날입니다.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기간입니다. 매년 이맘 때면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준비를 하느라 비즈니스가 바쁜 시절입니다. 또한 한 해를 잘 마치고 새해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적으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많은 감사할 제목들이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잘못하고 실수한 일을 돌아보고 교훈을 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감사의 제목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목장의 나눔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찾고 고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감사의 일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심지어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분명 감사할 일임에도 입술을 열어 감사하지 못하는 우리의 인색하고 완악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추수감사절은 감사의 제목을 찾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감사의 마음 뿐만 아니라 감사의 표현과 감사의 축제가 필요합니다. 감사는 표현할수록 배가가 됩니다.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 교회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새로운 예배공간으로 이사 온 일입니다. 그 결과로 멕시칸 미국분들과 예배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누에바 루즈(Nueva Luz)’ 침례교회는 지금의 후안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말씀생활을 강조하고 다음세대를 성경으로 가르치고 멕시코 현지선교를 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 교회와 같습니다. 올 추수감사절은 누에바 루즈침례교회와 주일 오전 11:00시에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쪽 회중분들이 한국어 설교와 찬양을 듣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타문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배 후에 두 교회가 점심식사를 준비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한국 음식과 멕시코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제가 한국어 설교와 영어설교를 준비하고 알메리스 자매가 에스빠뇰로 통역을 하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문화와 언어를 초월해서 은혜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추수감사주일 오후에는 이웃의 주님의 교회와 찬양축제를 엽니다. 작년에 해 봤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두 개의 영어 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에 충실히 연습해서 발표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교회에서 다과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는 작년과 같이 어린이와 유스 학생들을 위한 포장선물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맥알렌 지역에 여러 한인 교회가 있지만 우리와 형편이 비슷하고 좋은 분들이 모여 있는 주님의 교회와 앞으로도 공동사역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와 축제는 사람을 기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축제의 자리에 참석하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첫번째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납니다. 포도주가 끊어져 축하객들이 실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더 필요한 포도주를 물로 만드십니다. 축하객들은 다른 잔치와 다르게 더 맛 좋은 포도주를 뒤에 내놓았다고 주인을 자랑합니다. 기적의 역사를 통해 물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혼인잔치의 흥을 깨뜨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킵니다. 추수감사절 예배와 찬양의 축제를 통해 맥알렌 지역에 찬양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CSJ-


Monday, October 21, 2019

가정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 사역으로 교회를 만드시고 성령님은 가정과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며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안에서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가정을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선악과의 언약을 지키면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장 좋은 가정의 환경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언약을 깨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가정을 허문 것은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가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노력으로 세워진 가정은 늘 불안합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 없이는 온전한 가정을 구축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가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보다 악마의 유혹과 공격은 더 집요하고 악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영적 싸움을 함께 치러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많은 사역과 세미나와 집회가 있습니다. 가정을 위한 이런 모임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성경적 가정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회복을 위한 전문적인 상담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지역은 대도시와 떨어져 있는 관계로 가정 세미나와 집회가 자주 열리지 못합니다. 여력이 허락되는 데로 가정 회복을 위한 세미나와 집회가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주지역의 가정은 고국의 상황과 환경이 다릅니다. 이민가정에 맞는 가정 세미나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민가정의 다음세대를 위한 미래 지식도 필요합니다.
이런 필요를 위해 기도하던 중 몇몇 가정사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역자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전문적인 가정사역자들은 아니지만 이민교회의 가정이 겪고 있는 상황과 환경을 잘 이해하고 있는 휴스턴의 목회자들입니다. 휴스턴 지역에서 한번, 맥알렌 지역에서 한번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세미나를 통해 성경적인 행복한 가정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정사역이 안고 있는 어려움 중에 한 가지는 지속적으로 가정사역이 실제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감사한 것은 가정교회의 목장이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목장은 가정의 연합입니다. 부부만의 소통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진리를 쫓기 보다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틀린 결정인지 알면서도 부부 사이에만 있는 감정의 골은 최상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일 수 없는 옛사람의 모습이 부부사이에 나타나게 되어 정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장에서 몇몇 가정이 함께 모여 가정에서 일어난 사소하지만 심각한 문제와 어려움들을 나누다 보면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또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깁니다. 목장 안에서는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고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장은 가정을 고치는 병원입니다. 감추고 숨기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목장에서 드러내고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 가정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가정 세미나와 목장사역을 통해 우리 지역에 가정의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CSJ-


Monday, October 14, 2019

마음의 소통


소통이란 말은 막힌 것을 뚫는다는 의미입니다. 인간관계의 소통을 위해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화이전에 마음이 공감되어야 합니다. 서로 소통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계산적이고 이해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소통이라기 보다는 타협에 가깝게 됩니다.
마음의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는 겸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겸손은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듣고 싶은 데로 듣는 경향이 강합니다. 상대방이 설명하고 그리는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형상을 그립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이라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가 이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출생배경이 다르고 성장환경이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소통의 장애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다른 점을 인정하면 더 잘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통을 위해서는 같은 눈높이에 서로를 놓아야 합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마음과 정신의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도 필요하고 물리적인 눈높이도 필요합니다. 앉아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서 있다면 눈높이 차이로 대화가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물리적 눈높이가 주는 혜택을 이용하기 위해 의례 중에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 정상들이 만났을 때 의자의 높이를 교묘하게 조절하거나 시선을 정면을 응시할 수 없도록 만들어서 협상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사실 인간관계 소통의 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소원을 알아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을 경험한 신자가 VIP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조건적 사랑으로 또 한 없는 은혜로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지만,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깨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은 모세를 평가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만나시고 소통하십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때 하나님은 신자를 보호하시고 언약의 축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지도자 모세를 비방합니다. 하나님은 각 신자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인간의 짧은 소견으로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보이는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소통하지 않는 신자가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예수님의 한 몸 된 교회의 지체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신자가 품어야 할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기쁨으로 소통할 때 동일한 마음을 소유한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인내하며 온유하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CSJ-


Tuesday, October 8, 2019

구원의 길, 행복의 길


가정교회 사역 중에 예수 영접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비신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저희 교회도 매달 두번째 주일에 예수영접 시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고백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들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를 살리기 위한 구원사건임을 확신할 때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초청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침례를 받게 됩니다. 침례는 교회의 모든 성도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예수님 닮아가도록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구원에 대한 신학은 크게 알미니안 주의와 칼빈주의로 설명됩니다. 크게 장로교는 칼빈주의를 따르고 감리교, 성결교 등은 알미니안 주의를 따릅니다. 칼빈주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말씀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생활하도록 가르칩니다.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흔히 튜울립(TULIP) 교리라고 해서 인간의 전적타락(Total inabil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최종적인 견인(Final perseverance)를 주장합니다. 구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몇몇 이단들은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끝까지 견인해 주시므로 죄를 짓고 방종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죄악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다시 구원의 길, 교회의 한 몸의 지체로 돌아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인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해 갑니다.구원의 확신은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오늘 죽게 되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모시고 자신의 삶 전체를 통치하시는 왕으로 영접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알리니안 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가 믿음을 버리면 구원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씀을 늘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신학적으로 극단적 칼빈주의, 진보적 알미니안 주의는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침례교회의 신학은 특정한 신학이나 철학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교리나 신학체계에 신앙을 제한하기 보다는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통한 삶의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침례교회는 성경해석의 자유를 믿습니다. 굳이 침례교회의 구원신학을 설명한다면 침례교회의 구원관은 온건한 칼빈주의와 보수적 알미니안 주의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시간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첫 시작입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초청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믿어지도록 설득합니다.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기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존중합니다. 복음을 들을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활동하고 작용할 수 있도록 예수 영접이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