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23, 2019

부활 이후의 삶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10번 나타나셨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은 부활을 확증하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가에서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나타났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오해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 보고 나서야 부활의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고보는 유대주의 전통에서 자라나 후에 예루살렘의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 공의회의 의장이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야고보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교회를 맡아 목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부활을 향해 사는 신자가 교회의 직분자, 교회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 평강이 있으라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의구심과 두려움과 불안감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부활은 제자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운 것이 죽음인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닥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인생은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사건이지만 영원한 삶의 첫 탄생 사건이기도 합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에게 더 이상 죽음은 두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기뻐하며 즐거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원한 평강이 부활을 사모하는 성도에게 있습니다. 평안을 이루려는 인간의 노력은 부질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마음 속에 내주하실 때 영원한 평강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만나주시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세번이나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면서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제자 삼는 일이 부활을 믿는 성도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집중해 살면 이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성도의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부활의 경험은 삶의 지향점을 바꿉니다. 영원한 삶을 기대하며 하늘나라에서 신자가 거할 곳을 예비하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삽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배우고 익힌 말씀을 가르쳐 지키라고 대위임령을 주십니다. 부활을 믿는 신자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명자가 곧 부활의 사명자입니다. 지금도 복음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부활의 사명자는 복음이 비신자들에게 전파될 수 있도록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들에게 삶의 간증과 믿음의 고백을 통해 부활의 간증이 퍼져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은 부활의 증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부활의 증인입니다. -CSJ-


Tuesday, April 16, 2019

성 금요일의 성찬


성 금요일은 영어로 Good Friday, 동방교회에서는 ‘위대한 금요일 Great Friday’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금요일에 성찬을 제정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바뀌었지만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부활의 승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성도는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체험하여 재림의 날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되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의 금요일은 위대한 금요일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움이고 패배이고 실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승리입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미래가 십자가를 통하여 예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관점으로 보면 불행하고 억울한 사람입니다. 12제자 중 한 명인 가롯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고소를 당하고, 야유하는 군중들은 예수님 대신에 살인자를 방면해 달라고 요청했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처형을 명령합니다.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고, 로마병사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였으며 그 시신까지도 창을 찔러 훼손합니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사건을 다 겪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조롱하고 정죄하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으셨고, 오직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의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누구든지 이 십자가 사건을 나를 위한 생명의 사건으로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 금요일이 더욱 특별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시작하시고 그 의미를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시고 제정하셨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살은 떡으로 피는 포도주로 기념하여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의 구주 되심과 그의 십자가의 정신을 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이 십자가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교회는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경험하고 다시 십자가의 은혜로 돌아왔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성도는 성찬에 참여하여 십자가 은혜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있는 여정이 아닙니다. 교회의 지체가 되어서 영적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합니다. 성찬은 교회가 예수님의 한 몸임을 확인하고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의 살과 피로 성도는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 거하시면서 말씀을 일깨워주고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성도는 구원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성 금요일의 성찬으로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회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CSJ-

Monday, April 8, 2019

자기 소견대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결정을 해 나가며 살아갑니다. 살면서 쌓은 경험, 배운 지식, 물려받은 전통 등을 이용해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사사기에는 12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사사가 히브리어로 재판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는 왕이 세워 지기 전 시대의 모든 통치 업무를 맡아 합니다. 사사기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이웃 나라들에 의해 고통을 받은 후, 죄악을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 구원하는 과정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잘못 이해한 백성들은 왕이 없어서 이런 일이 벌이진 줄 알고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통치자를 세워 그 아래 살겠다는 것 입니다. 이들의 상태를 사사기 176절에는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자기의 소견대로 예배를 드리고 살아가지만 언약의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와 방법을 따라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신명기 12: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자기의 소견대로 자기의 판단대로 불순종하여 악한 행위와 완악한 마음과 행동은 바꾸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사기 백성들의 상태는 현재 구원의 여정을 밟아가고 있는 성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불안한 미래를 책임질 물질, 인간 관계, 명예, 사회적 지위 등을 우상으로 삼아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주어진 삶의 환경을 자족하고 감사의 제목을 찾아 살면 하나님은 기대치 못한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성공을 추구합니다. 물질이 더 모아지면 선교해야 지, 사회적으로 이정도 직책은 있어야 교회에서도 큰소리 치지, 인간 관계가 좋아야 성공하지, 열심히 사는데 누릴 건 누리며 살아야 지 등등의 생각으로 자기 소견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거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면 미래에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또 미래의 더 낫은 삶을 위해 현재를 분주하게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미래는 현재에 이미 와 있습니다. 지금 있는 환경과 조건 속에서 행복을 경험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뭔가 채워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사 시대의 백성들과 같은 겁니다.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상과 타락한 문화에 빠져 살면서 정치가 불안전하니까, 군사력이 없으니까, 통치지자가 없으니까, 물질이 없으니까라고 말하며 세상 사람들과 같이 왕이 있으면 미래가 행복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는 자기 소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십니다. 성장하고 성숙한 다음이 아니라 지금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믿음생활을 행복하게 누리면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CSJ-


빛의 열매


태초에 아무 것도 없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빛이 생겨라  말씀하시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의 창조로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낮을 거룩함의 시간으로 밤을 죄의 시간으로 묘사 합니다. 이는 빛의 기능이 제일 먼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둠은 종종 악마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악마는 어둠을 지배하고 어둠 속에 거합니다. 악마는 마음을 어둡게 하여 두 마음을 품게 하고 참을 거짓으로 왜곡하여 진리를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무엇보다 악마는 율법주의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지키는 것 같은데 생명을 얻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이전에 다소 사람 사울이었을 때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율법주의자 사울에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수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파괴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예수의 추종자였습니다. 제자들을 위협하고 살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없애라는 명령을 받고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끌어내어 감옥에 넘겼습니다(8:3). 그러나 다마스쿠스 길 위에서 환한 빛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비로서 사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환한 빛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율법주의자에서 이방의 빛 된 사도로 바뀐 것 입니다.
과학적으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입니다. 작은 알갱이처럼 운동하는 입자성과 물결을 일으키는 파동성을 동시에 갖습니다. 이를 빛의 이중성(duality)이라고 합니다. 현대과학은 아직도 빛의 정의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빛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습니다.  빛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음으로써 많은 응용이 가능합니다.  빛은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볼 수 없는 빛도 있고,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얼마전 청색 빛을 만들어 낸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기도 했습니다. 빛의 응용은 의료, 통신 분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TV, 컴퓨터, 스마트폰 등 거의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빛을 지배하는 국가가 21세기를 선도하게 됩니다.
빛의 속성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속성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거룩함과 경건함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고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나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굴의 밝은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빛은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은 세상의 어둠을 물러가게 하여 세상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는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사명을 갖습니다. 죄악의 흑암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같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입니다. 교회는 눈먼 사람의 길잡이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의 빛입니다. 데살로니가 55절은 성도를 가리켜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라고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악마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교회는 이 어둠을 대적하는 빛의 군사들입니다.  -C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