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26, 2019

말의 이해와 오해


성경은 사람의 말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운다고 야보고서는 말합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혀는 내 몸의 지체이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말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마음에 없는 이야기이라도 순간의 감정으로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단어들을 끄집어 내어 말로 표현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을 다스리는 사람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에모토 마사루라는 일본 과학자는 쌀을 끓여서 동일한 두 용기에 분배한 후 일정기간 동안 말의 힘을 실험했다고 합니다. 첫째 쌀 용기는 칭찬과 긍정적이고 유쾌한 말을 해 주고, 둘째 쌀 용기에는 모욕, 경멸, 증오심을 표현하는 말을 내 뱉었습니다. 놀랍게도 긍정적인 말을 들은 쌀 용기에서는 쌀이 상하지 않고 유지된 반면, 부정적인 말을 들은 쌀 용기에는 곰팡이가 피어 악취가 났다고 합니다. 말은 이렇게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말은 품고 있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말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 마음 속의 긍정적인 뜻을 말해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나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부정적으로 꼬여 있을 때에는 곡해되어 전달되기도 합니다.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되는데 오히려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또 진리를 말하고 진실을 말해도 자기 경험과 철학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은 듣지 않습니다. 또 말의 범위가 듣는 이의 지성을 초월해 있을 때 같은 말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통해 소통한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동일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가르칠 때 좋은 교사가 됩니다. 배우는 사람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해야 제대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의 소통은 말하는 화자 토커 talker 나 듣는 청자 리스너 listener가 모두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배우려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말을 안 하실 정도였습니다. 창조주 예수님의 지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라도 들으면 알 수 있는 개념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 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의 한계와 이해의 체계를 아시고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비유를 들었지만 그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바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풀어 주실 때 비로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말의 소통 원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서로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이해하고 예를 들어 이야기하고 설명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고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배우려는 자세가 없었습니다. 말의 이해를 위해 청자와 화자가 모두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CSJ-


돈, 인간관계 그리고 십자가


인간은 누구나 이 땅을 한 번 살면서 나름대로의 성공을 지향하며 이루며 삽니다. 이루어 놓은 일들을 돌아보며 만족해 하고 이생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한 세상의 그림자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삶의 모습과 경험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신자중에서도 이 세상이 끝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나쁜 일을 하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영원한 삶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보낼 수 있을까 하며 살아갑니다. 이 땅만 보고 삽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영적 자산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소통되고 있는 돈을 모으고,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위해서만 삽니다.
돈은 필요한 물질입니다. 그러나 돈은 이 세상에서만 유용합니다. 다음 세대에게 돈을 물려주기 위해 더 많이 벌려고 합니다. 과연 더 많은 돈을 자녀에게 물려준다고 해서 자녀들이 행복할까요?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은 돈에 더 집착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 아닐까요? 혹시 모를 미래의 사건 사고 때문에 돈을 모은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안한 미래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 입니다. 과연 돈이 있으면 사건 사고를 해결하고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사건 사고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보험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지만 의외로 돈 때문에 벌어지는 걱정과 염려가 더 많습니다.
인간관계가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제를 위해 모임에 참석해야 하고, 함께 자리하지 않으면 소외 당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보통 인간관계는 친구관계나 혈연관계가 아니면 친목이나 이익을 추구하거나 과제를 수행하는 만남입니다. 친구나 혈연관계는 정기적으로 만나거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만나서 꼭 무엇을 해야 하는 만남은 아닙니다.
친구의 만남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면 참 좋은 관계가 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에게 말하듯이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친구관계가 해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을 도모하고, 불건전한 문화에 참여하고, 이용하려고 할 때 진정한 친구관계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잘못된 인과관계 신학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라는 것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6:15)라고 탄식합니다. 잠언 194절은 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라고 말합니다.  돈은 친구를 모을 수 있지만 진정한 친구관계는 돈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관계가 하늘나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 형제가 되는 관계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십자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십니다.  -CSJ-


Wednesday, March 13, 2019

믿음의 삶


성도의 삶은 곧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믿음을 주시는데 사모하여 구하는 자에게 믿음을 더 해 주십니다. 믿음은 노력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거하는 증거로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유럽을 다녀오지 않아도 유럽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순신 장군을 만나보지 않아도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활동했던 장군으로 압니다.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있고, 역사적 자료가 있으면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근원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로부터 왔는지 아는 것이 믿음을 키우는 비결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된 우리를 의인삼아 주신 구원의 역사를 알고 깨달어 믿게 되면 믿음이 시작됩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이 믿음을 지키고 행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선한 결과로 믿음이 계승됩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으로 확증됩니다. 야고보서 2:20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일갈합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행함이 함께 증거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단련하십니다. 환난과 시험이 있을지라도 믿음을 지켜 사명을 다하는 삶의 수련을 통해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믿음의 목표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중생하는 체험이 있어도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이루기 위해 말씀의 훈련을 받고 장성한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신의 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셨음을 믿고 하늘나라 소망을 갖고 하늘의 복을 구하며 구원을 이룩하며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의 성숙함은 믿음의 식구들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속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고 하면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마음과 관련이 있다면 사랑은 행함과 연결됩니다. 마음으로 믿고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22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라고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곧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사랑과 평화의 본으로 세워져서 이 세상에 이익과 물질을 좇는 무리들을 부끄럽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확고한 믿음을 갖추어 나가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없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믿음을 원해도 죄악 된 마음으로는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하며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CSJ-